정진석 추기경, 통장 잔액 '800만원' 그마저도 기부... 떠나며 한 '마지막' 당부는?

메거진한경/서울대교구
메거진한경/서울대교구

그가 세상을 떠나고 통장을 보니 약 800만원의 잔고가 있었습니다. 그의 뜻에 따라 이 금액을 기부하거나 의료진과 지인들에게 작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 추기경은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우리 지역 사회의 사람들과 시간을 나누라고 강조했습니다.

정진석 전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선종 이튿날 오전 10시, 천주교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대변인이 브리핑을 했다. 브리핑 도중 한 기자가 통장 잔고를 묻자 허영엽 신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장내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다소 소란스러웠다.

정 추기경은 지난 2월 중태에 빠졌을 때 이미 명동식당과 어린이 교육기관에 1000만원을 기부했다. 당시 그가 재산이 없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가 남긴 800만 원은 이후 두 달 동안 개인 경비와 참전용사 연금(한국전쟁 참전)을 충당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다.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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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재산을 내놓고 세상을 떠난 한 남자의 거대함을 목격하면서 단순한 감탄을 넘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27일 밤 허 신부가 전한 정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은 평화로웠다.

허 신부는 고인이 염수정 추기경, 주교, 신부, 수녀, 주치의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자주 말하셨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고 전했다.

대한민국 천주교의 상징인 명동성당에서 정 추기경은 일생을 바쳐 천주교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뒤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신앙의 산증인이 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1931년 12월 2일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정원모는 경성제1사범고(후에 경기고가 됨)를 다녔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두 번 투옥되었다. 할아버지가 명동성당 담임목사였기 때문에 정 추기경은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세례를 받았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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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명동성당 새벽미사에 자주 참석했고, 계성사범학교 책에 푹 빠졌다. 그는 일본어로 쓰여진 과학 서적에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되었고 발명가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의 꿈은 1950년 중앙고에 다니고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하면서 이루어졌다. 불행하게도 같은 해 시작된 한국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되면서 운명은 그에게 다른 계획을 세웠다.

폭격 중에 친척의 남동생이 죽는 것을 목격한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방위군에 징집된 후 그는 미군 통역사로 복무했다. 이때 그는 'Saint Maria Goretti'라는 영어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만남은 그를 새로운 소명으로 이끌었고 그는 자신의 삶을 사제직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자 당시 명동 성당의 신부였던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만류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직접 나서 노 주교를 설득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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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신학교에 입학한 정 추기경은 7년 뒤인 1961년 사제품을 받았다. 1968년에 그는 로마로 가서 우르바노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1년 반 만에 교회법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1970년 한국 최연소 주교로 부임했다.

부임과 함께 청주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곧바로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목가적 모토인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을 따라 자신을 낮추고 열심히 일했다. 재임 중 청주 교구 신도는 20년 동안 4만8000명에서 8만 명으로 늘었다.

정 추기경은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이 정년에 이르러 은퇴한 뒤 한국 천주교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서울대교구의 역동성에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교구장 선출을 사제들의 투표로 결정하고, 본당 대회를 열어 교리와 규율을 심의하고, 공동체의 관심사를 듣는 데 초점을 맞추는 민주적인 사목 제도를 확립했다.

명동성당
명동성당

그는 생명 운동의 열렬한 옹호자였으며 2006년에 뇌사 시 장기 기증과 사망 후 각막 기증 의사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은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 600여명의 동의를 얻어 정 추기경과 뜻을 함께했다.

정 추기경은 교회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그 분야의 전문학자로 널리 인정받았다. 평생 동안 그는 거의 50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원본 작품을 번역하고 집필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공헌은 '교회법 강령' 및 '가톨릭 교리 입문'과 같은 제목으로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가톨릭 공동체 내에서 존경받는 위치를 유지하면서 인기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정 추기경의 비서로 일했던 허 신부에 따르면 정 추기경은 결단을 내릴 때 강한 직업윤리를 지닌 부지런한 학자였다. 그는 일단 행동 방침을 정하면 끈질기게 그것을 추구했다.

정 추기경은 정치나 이념에 대해 거의 거론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큰 일을 해낸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추기경 재임 기간 동안 본당이 100개 증가하고 종신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1898광장을 비롯한 명동성당 일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정경 법에 대한 그의 논평은 정경으로 간주됐다.

 

정진석 추기경의 사목 표어인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묘비명으로 정해졌다

서울대교구
서울대교구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는 30일 줌을 통해 열린 온라인 브리핑에서 故 정진석 추기경의 묘비명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라고 밝혔다. 추기경의 관은 삼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표준 관보다 10cm 더 길다. 관은 또한 새겨진 문장으로 구별된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후 5시 명동성당 입관예절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5월 1일 토요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정 추기경의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이날 미사는 대한천주교주교단과 사제단이 공동으로 집전했다. 미사 중 주한 교황 대사 알프레드 슈레브 대주교가 교황의 애도 메시지를 낭독했다.

영결식이 끝난 뒤 고인의 시신은 경기도 용인천주교공원묘지 사제묘역으로 옮겨졌고 김수환 추기경 옆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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